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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개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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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개파''' 또는 '''사두가이파'''는 유대교 제사장<ref>제사장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야훼]] 하느님께 동물이나 고운 밀가루로 희생제사를 드리던 [[성직자]]를 말한다. [[공동번역]]에는 사제, 개역한글판에는 제사장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예수가 살던 시대에 이들은 [[유대인]]들에게 정통성을 인정받던 예루살렘의 성전(신전)에서 장사하던 자들과 결탁하여 성전에 제사를 드리러 온 신도들을 착취하였다.신도들이 가지고 온 가축을 보고 하느님께 바치기 어렵다고 퇴짜를 놓아서 성전의 가축장수에게 가축을 사지 않을 수 없도록 한 것이다.</ref>을 중심으로 한 사상 세력으로서 [[유대교]]의 조류이다. 이들은 [[모세5경]]만 경전으로 인정했으며, 매우 물질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특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을 인정하지 않아서, [[루가 복음서|루가의 복음서]]에는 부활에 대해 사두가이파와 [[예수]]가 논쟁을 벌였다는 내용이 나온다.<ref>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 몇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사두개파''' 또는 '''사두가이파'''는 유대교 제사장<ref>제사장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야훼]] 하느님께 동물이나 고운 밀가루로 희생제사를 드리던 [[성직자]]를 말한다. [[공동번역]]에는 사제, 개역한글판에는 제사장으로 번역되어 있다.</ref>을 중심으로 한 사상 세력으로서 [[유대교]]의 조류이다.

"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정해 준 법에는 형이 결혼했다가 자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칠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내를 얻어 살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둘째가 형수와 살고 다음에 셋째가 또 형수와 살고 이렇게 하여 일곱 형제가 다 형수를 데리고 살았는데 모두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나중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이렇게 칠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았으니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저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죽는 일도 없다.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모세도 가시덤불 이야기에서 주님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이것으로 모세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루가복음서 20:27-38)</ref>
== 개설 ==
사두가이는 다윗 시대의 대사제였던 사독에서 파생된 말로, 사독의 후손들은 마카베오 시대까지 사제직을 수행했다. 그들은 바리사이 파 사람들과 함께 산헤드린에서 법관의 역할도 했다. 그들은 모세 오경으로만 국한된 모세 법에 배타적으로 집착하고, 바리사이 파 사람들이 받아들인 온갖 주석과 전승들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그들과 구별된다. 그들은 특히 천사나 악마의 존재뿐만 아니라 부활 사상과 내세에서의 보상(마태 22,22-33)이라는 생각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루가 복음서|루가의 복음서]]에는 부활에 대해 사두가이파와 [[예수]]가 논쟁을 벌였다는 내용이 나온다.<ref>루가 20:27-38</ref> 사두가이 파 사람들은 [[유대교]]의 신학과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바리사이 파 사람들과 달리 [[헬레니즘]]의 영향을 그대로 방치했다.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족속들’(마태오 3:7)로 취급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 제국]]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인 기득권을 누린 친로마파였다. 하지만 사두가이파들의 활동무대였던 [[예루살렘]]이 [[유대독립전쟁]]으로 붕괴되면서 사두가이파들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ref>〈부활-갈릴리로의 초대〉,서재경/《기독교 사상》2006년 4월호/대한기독교서회</ref>
정치적으로는 [[로마 제국]]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인 기득권을 누린 친로마파였다. 하지만 사두가이파들의 활동무대였던 [[예루살렘]]이 [[유대독립전쟁]]으로 붕괴되면서 사두가이파들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ref>〈부활-갈릴리로의 초대〉,서재경/《기독교 사상》2006년 4월호/대한기독교서회</ref>


== 바깥고리 ==
*[http://jewishencyclopedia.com/view.jsp?artid=40&letter=S&search=Sadducees Jewish Encyclopedia: Sadducees]
*[http://www.newadvent.org/cathen/13323a.htm Catholic Encyclopedia: Sadducees]
*[http://www.1911encyclopedia.org/Sadducees Encyclopedia Britannica: Sadducees]
== 각주 ==
== 각주 ==
<references/>
<references/>

2007년 9월 8일 (토) 23:34 판

사두개파 또는 사두가이파는 유대교 제사장[1]을 중심으로 한 사상 세력으로서 유대교의 조류이다.

개설

사두가이는 다윗 시대의 대사제였던 사독에서 파생된 말로, 사독의 후손들은 마카베오 시대까지 사제직을 수행했다. 그들은 바리사이 파 사람들과 함께 산헤드린에서 법관의 역할도 했다. 그들은 모세 오경으로만 국한된 모세 법에 배타적으로 집착하고, 바리사이 파 사람들이 받아들인 온갖 주석과 전승들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그들과 구별된다. 그들은 특히 천사나 악마의 존재뿐만 아니라 부활 사상과 내세에서의 보상(마태 22,22-33)이라는 생각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루가의 복음서에는 부활에 대해 사두가이파와 예수가 논쟁을 벌였다는 내용이 나온다.[2] 사두가이 파 사람들은 유대교의 신학과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바리사이 파 사람들과 달리 헬레니즘의 영향을 그대로 방치했다.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족속들’(마태오 3:7)로 취급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 제국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인 기득권을 누린 친로마파였다. 하지만 사두가이파들의 활동무대였던 예루살렘유대독립전쟁으로 붕괴되면서 사두가이파들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3]

바깥고리

각주

  1. 제사장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야훼 하느님께 동물이나 고운 밀가루로 희생제사를 드리던 성직자를 말한다. 공동번역에는 사제, 개역한글판에는 제사장으로 번역되어 있다.
  2. 루가 20:27-38
  3. 〈부활-갈릴리로의 초대〉,서재경/《기독교 사상》2006년 4월호/대한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