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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0월 17일에 이우를 가족의 동의없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하는 영새봉안제(靈璽奉安祭)가 거행되었다.<ref name="hani"/> 사망자의 이름, 사망 장소, 사망 날짜 등이 적혀 있는 영새부를 야스쿠니 신사의 [[신체 (신토)|어신체]]가 있는 본전에 놓으면 영새부에 적혀 있던 인간의 혼령이 어신체에 깃들어 신령이 된다는 것이다.<ref>{{뉴스 인용|제목=〈토요판 커버스토리〉 군국의 城, 야스쿠니|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2460228|출판사=동아일보|저자=박형준, 배극인|날짜=2013-08-10|확인날짜=2013-11-08}}</ref> 조선인 강제 합사에 대한 야스쿠니 신사의 공식적인 의견은 “사망 시점에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지킨 신으로 모시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황족과 평민을 같은 자리에 모실 수 없다며 사망한 일본 황족을 따로 분리하여 합사하였던 야스쿠니 신사는 사망 당시에 일본 황족과 동등한 지위였던 이우를 일반 군인과 같은 수준으로 합사하였다. 2007년에 이우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사실이 언론을 통하여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었다.<ref name="KBS"/><ref name="hani"/>
1959년 10월 17일에 이우를 가족의 동의없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하는 영새봉안제(靈璽奉安祭)가 거행되었다.<ref name="hani"/> 사망자의 이름, 사망 장소, 사망 날짜 등이 적혀 있는 영새부를 야스쿠니 신사의 [[신체 (신토)|어신체]]가 있는 본전에 놓으면 영새부에 적혀 있던 인간의 혼령이 어신체에 깃들어 신령이 된다는 것이다.<ref>{{뉴스 인용|제목=〈토요판 커버스토리〉 군국의 城, 야스쿠니|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2460228|출판사=동아일보|저자=박형준, 배극인|날짜=2013-08-10|확인날짜=2013-11-08}}</ref> 조선인 강제 합사에 대한 야스쿠니 신사의 공식적인 의견은 “사망 시점에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지킨 신으로 모시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황족과 평민을 같은 자리에 모실 수 없다며 사망한 일본 황족을 따로 분리하여 합사하였던 야스쿠니 신사는 사망 당시에 일본 황족과 동등한 지위였던 이우를 일반 군인과 같은 수준으로 합사하였다. 2007년에 이우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사실이 언론을 통하여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었다.<ref name="KBS"/><ref name="hani"/>


1970년 4월 10일에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히로시마 현 본부에 의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건립되었다.<ref name="위령비1">{{뉴스 인용|제목=반쪽난 히로시마 위령비를 아십니까|url=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0543.html|저자=스나미 게스케|출판사=한겨레21|날짜=2007-08-23|확인날짜=2012-06-04|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203030436/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0543.html|보존날짜=2013-12-03|url-status=dead}}</ref> [[히로시마시]]의 반대로 위령비의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건립이 어려워지자<ref name="위령비2">{{뉴스 인용|제목=한일 양국의 ‘무시와 방치’… 밀항서 법정투쟁까지|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36718|저자=이승욱|출판사=오마이뉴스|날짜=2005-02-10|확인날짜=2012-06-04}}</ref> 이우가 피폭을 당한 후 발견된 장소였던 히로시마 혼가와의 아이오이 교 근처에 세워졌다. 위령비의 전면에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와 함께 ‘이우공 전하 외 2만여 영위’라는 문구가 적혀있고, 뒷면의 비문에는 ‘나라 잃은 왕손이기에 남모를 설움과 고난이 한층 더 했던 이우공 전하를 비롯하여 … 이우공 전하 외 무고한 동포 2만여 위 …’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1999년 7월 21일에 위령비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안으로 이전되었다.<ref name="KBS"/><ref name="위령비1"/>
1970년 4월 10일에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히로시마 현 본부에 의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건립되었다.<ref name="위령비1">{{뉴스 인용|제목=반쪽난 히로시마 위령비를 아십니까|url=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0543.html|저자=스나미 게스케|출판사=한겨레21|날짜=2007-08-23|확인날짜=2012-06-04|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203030436/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0543.html|보존날짜=2013-12-03|깨진링크=}}</ref> [[히로시마시]]의 반대로 위령비의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건립이 어려워지자<ref name="위령비2">{{뉴스 인용|제목=한일 양국의 ‘무시와 방치’… 밀항서 법정투쟁까지|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36718|저자=이승욱|출판사=오마이뉴스|날짜=2005-02-10|확인날짜=2012-06-04}}</ref> 이우가 피폭을 당한 후 발견된 장소였던 히로시마 혼가와의 아이오이 교 근처에 세워졌다. 위령비의 전면에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와 함께 ‘이우공 전하 외 2만여 영위’라는 문구가 적혀있고, 뒷면의 비문에는 ‘나라 잃은 왕손이기에 남모를 설움과 고난이 한층 더 했던 이우공 전하를 비롯하여 … 이우공 전하 외 무고한 동포 2만여 위 …’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1999년 7월 21일에 위령비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안으로 이전되었다.<ref name="KBS"/><ref name="위령비1"/>


2000년대에 이우의 사진과 일화가 각종 포털 사이트와 인터넷 게시판에 소개되면서 네티즌들의 주목을 받았고 ‘얼짱 황손’으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클릭! 이 주일의 키워드〉‘원조 얼짱’은 대원군 손자 이우|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214153|저자=김경달|출판사=동아일보|날짜=2003-11-13|확인날짜=2012-07-26}}</ref>
2000년대에 이우의 사진과 일화가 각종 포털 사이트와 인터넷 게시판에 소개되면서 네티즌들의 주목을 받았고 ‘얼짱 황손’으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클릭! 이 주일의 키워드〉‘원조 얼짱’은 대원군 손자 이우|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214153|저자=김경달|출판사=동아일보|날짜=2003-11-13|확인날짜=2012-07-2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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