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헌황귀비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1854년 1월 21일(음력 1월 5일) ~ 1911년 7월 20일)는 대한제국 고종의 후궁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태자(영친왕)의 어머니이다. 양정고등학교, 진명여자고등학교, 숙명여자대학교의 전신이 되는 양정의숙, 명신여학교, 진명학원 등을 설립하였다.
순헌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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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고종의 후궁 |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54년 1월 21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서소문방 |
사망일 | 1911년 7월 20일 | (57세)
사망지 | 경성부 덕수궁 함녕전 |
부친 | 엄진삼 |
모친 | 밀양 박씨 |
배우자 | 고종 |
자녀 | 영친왕 이은 (의민황태자) |
능묘 | 영휘원(永徽園)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홍릉로90 |
생애
편집출생
편집1854년 음력 1월 5일 / 양력 2월 2일 한성부 서소문방 서소문에서 평민인 엄진삼(嚴鎭三)의 장녀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엄재우(嚴載祐)는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자헌대부 의정부참찬에 증직되었다. 할아버지 엄재우의 증직은 양 남동생 엄준원의 출세로 추증된 직위이고, 아버지 엄진삼의 직책인 의정부 찬정은 사후 증직된 것이다. 그의 큰아버지인 엄진일은 고종 초에 무관으로 창덕궁위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윤효정에 의하면 엄귀비의 친정아버지 엄진삼은 종로 육전거리에서 장사를 했다고도 한다.[1] 집안이 빈한하였던 그녀는 1861년 1월, 나이 8세 때에 궁녀가 되어 입궐하였고, 경복궁의 나인으로 배치되었다.
아버지 엄진삼에게는 오빠 엄봉원, 엄학원이 일찍 죽은 뒤 아들이 없었으므로 큰아버지 엄진일의 아들이자 그의 사촌남동생인 엄준원이 아버지의 양자가 되었기에 진명학원(진명여자고등학교)의 창립자인 엄준원은 그의 양 남동생인 셈이다. 뒤에 다시 엄준원의 아들 중 한명인 엄주명은 엄봉원의 양자가 되었다.
입궐 초기
편집1882년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가 실종되자 그는 고종을 지극 정성으로 보필하여 그 공으로 지밀상궁이 되었다.[1] 이후 명성황후의 시위상궁(侍衛尙宮)으로 있었으며, 명성황후 생전인 1885년 32세에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가 명성황후에게 발각되면서 궁궐에서 쫓겨났다.
명성황후에 의해 대궐에서 쫓겨날 당시 엄귀비는 상궁직을 박탈당하고 서인이 되게 하였으나 당시 대신 윤용선이 고종에게 간곡하게 말하여 서인만은 면하게 되었다.[1] 후에 엄귀비는 윤용선의 은혜를 늘 잊지 않고 있다가 순종의 계비를 간택할 때 윤용선의 손녀를 추천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이후 다시 입궐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아관파천 때는 고종을 모시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같이 생활하였으며, 1897년 황자 은(垠, 의민태자)을 낳고 이틀 후 정식으로 귀인에 봉작되었다. 이후 순빈, 순비로 차례로 진봉되었고, 나중에는 황귀비로 봉해졌다. 이준용은 일본 망명 직후부터 엄상궁의 빈 책봉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어 고종은 명성황후의 빈자리를 대체할 인물로 엄상궁을 택하고 그를 황후로 격상시키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준용은 망명 한인들에게 이를 알리며 반대 운동을 준비한다.
이준용과의 갈등과 빈 책봉
편집1899년 4월 이준용은 일본망명객들이 벌인 엄상궁의 황후책봉에 대한 반대운동에 가담하였다.[2] 그는 유길준, 권동진, 조중응 및 기타 2~3인과 함께 논의한 결과 신분이 낮은 엄상궁을 황후로 삼는 것은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조치라는 이유를 들어 엄상궁의 황후 책봉을 반대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의사를 담아 궁내부대신 이재순에게 충고서를 보내기로 하였다.[2] 이준용은 엄상궁의 출신 성분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왕실의 위신에 관련된 문제라며 엄상궁의 황후 책봉을 반대하였다.
또한 이준용은 아버지 흥친왕에게 서한을 보내 엄상궁 같은 미천한 소생이 황제의 총애를 얻은 것을 기화로 간신배들이 벼슬을 얻기 위해 엄상궁을 황후로 책봉하려 기도하고 있으니, 이러한 때에 황실에 관계된 이들은 반대의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준용이 엄상궁의 황후 책봉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인 것은[2] 엄상궁이 자신의 아들 황자 이은의 권력 승계를 위해 일본에 망명중인 이준용과 이강 등을 극력 배척하였기 때문이다.[3] 그러나 이런 처지에서 이준용의 엄상궁 황후 책봉 반대운동은 도리어 그의 신변에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3]
엄상궁과 그의 측근들은 고종에게 이준용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고했고, 명성황후의 암살에 이준용이 개입되었다고 확신하던 고종은 이준용 제거를 결심한다.
이준용의 강한 반대와 국내 종친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들 은의 출산 직후 상궁에서 귀인(貴人)이 되고 1900년 순빈이 되었다. 1901년에 비(妃)로 진봉되고, 1903년에는 황귀비(皇貴妃)로 책봉되었다.
아들 은의 황태자 추대 노력
편집순종에게 아들이 없었고 그가 엄청 병약했기에 엄귀비는 자신의 아들 황자 은을 황태자로 올릴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를 안 의친왕이 반발하면서 의친왕과도 갈등하게 된다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고종은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태자로 영친왕 이은을 결정하였다.[4][5]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과[6] 이강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7]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은 순종의 사촌형으로 , 이강은 황태자의 숙부라는 지위로 바뀐다.[7]
생애 후반
편집아들 영친왕을 순종의 태자로 만드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영친왕은 이토 히로부미가 자신이 황태자 사부(師父)라는 명목 하에 일본으로 인질로 데려갔다. 아들 영친왕이 일본의 사관학교에서 고된 훈련을 받는 도중 점심을 주먹밥으로 먹는 장면을 촬영한 필름을 보게 되었는데, 이를 보고 애통해하다가 먹던 떡이 급체하기도 했다 한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귀비로 불렸다.
1905년 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교)을, 1906년 진명여학교(현 진명여자고등학교)와 명신여학교(현 숙명여자대학교)를 세웠다. 1911년 7월 장티푸스에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 7월 20일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향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8]. 당시 그의 아들 영친왕은 일본에 체류중이었다.
사망 후 순종에게 사시격인 '순헌'이란 시호를 받았다.
사후
편집양주 천수산(天秀山)에 안장되었고 묘호는 영휘원이라 하였다. 후에 그녀의 생전에 얼굴을 못본 장손 이진이 갑자기 독살당하면서 그녀의 묘소 건너편에 안장되었다.
위패는 칠궁에 추가로 봉안되었다.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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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편집
부군편집
자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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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작품
편집영화
편집- 김지미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1959년)
- 전계현 - 《청일전쟁과 여걸민비》(1965년)
TV 드라마
편집관련 문화재
편집- 봉원사 아미타괘불도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63호
기타
편집여성의 교육과 문맹 탈출을 주장하던 개신교 선교사들의 견해에 깊이 공감한 그는 1905년 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교)을, 1906년 진명여학교(현 진명여자고등학교)와 명신여학교(현 숙명여자대학교)를 설립하는 데 후원하였다. 또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에도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보내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지급하게 했다.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다 윤효정, 《대한제국아 망해라》(박광희 국역, 다산초당, 2010) 337페이지
- ↑ 가 나 다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27쪽.
- ↑ 가 나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28쪽.
-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69) 635
-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69) 641
- ↑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3쪽
- ↑ 가 나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4쪽
- ↑ 사흘 후인 7월 23일 상을 치르기 위해 아들 은(垠)이 귀국하였을 때, 일제는 위생상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그의 함녕전 접근을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