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생오랍총관아문
타생오랍총관아문(打牲烏拉總管衙門, 만주어: ᠪᡠᡨᡥᠠ
ᡠᠯᠠ
ᡤᡡᠰᠠ ᠪᡝ
ᡴᠠᡩᠠᠯᠠᡵ
ᠠᠮᠪᠠᠨ
ᠶᠠᠮᡠᠨ Butha Ula be Kadalara Amban Yamun)은 색륜총관아문(索倫總管衙門), 타생총관(打牲總管), 타생처총관(打牲處總管), 타생색륜달호이총관(打牲索倫達呼爾總管), 흑룡강타생처총관(黑龍江打牲處總管), 포특합타생처총관(布忒哈打牲處總管)이라고도 한다.[1]
청대에 붙하(打牲, 만주어: ᠪᡠᡨᡥᠠ Butha)는 수렵과 채취를 통해 육지의 동식물과 하천의 어류를 포획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수렵과 채집 활동 뿐만 아니라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는 부락, 특히 흑룡강 일대에 거주하는 솔온(索倫, 만주어: ᠰᠣᠯᠣᠨ Solon)ㆍ다우르ㆍ오론촌 등을 두루 가리키기도 했다.
청대 만주의 수렵 채집은 황실 내무부에 진공하는 것과 국가의 공부(貢賦)로 나뉘었다. 황실 내무부와 관련된 업무는 붙하 울아(打牲烏拉, 만주어: ᠪᡠᡨᡥᠠ
ᡠᠯᠠ Butha Ula) 총관아문과 성경의 내무부에서 관리했고, 국가의 공부(貢賦)는 길림장군아문과 흑룡강장군의 타생오랍아문에서 관리했다.[2]
타생오랍총관아문은 내무부와 마찬가지로 청대에 처음으로 등장한 특수 기구였다. 타생총관아문은 길림장군의 관할 영역에 위치해 있었지 만, 내무부에 직속된 기구로서 황실의 수렵채집 관련 활동을 총괄하며 황제와 내무부 외에는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기구였다. 울라 지역의 관원이나 거주민의 숫자가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타생오랍총관이 황제가 직접파견하는 3품관의 고위직이었다는 사실은 타생오랍아문의 중요성을 반증한다. 황실의 발상지에서 수렵과 채집 활동을 관리하며 만주족의 전통을 보호한다는 타생오랍총관의 역할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타생오랍 생정(牲丁)은 팔기 조직으로 편제되었고, 다시 주햔(珠 軒, Juhiyan) 단위로 나뉘어 각각 역을 수행했다. 생정의 수렵과 채집 활동은 생산활동이자 동시에 군사훈련이기도 했다. 타생오랍생정은 이처럼 팔기조직에 근 거하여 독특한 방식으로 경제적ㆍ군사적 임무를 수행했다.[3]
타생오랍총관은 청대 길림성 동쪽 40여리 떨어진 울라 가(烏拉街, 만주어: ᡤᡠᠯᠠ
ᡤᡳᠶᠠᡳ Ula Giya))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백두산과 송화강 사이에 위치하여 남북 교통의 요충지였
을 뿐만 아니라 인삼ㆍ녹용ㆍ동주ㆍ초피 등 만주의 유명한 특산품과 철갑상어ㆍ잣ㆍ솔방울ㆍ벌꿀 등 황실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공품이 생산되었다. 원래 왕(王) 이하 공(公) 이상은 울아 지역에 장정을 파견하여 동주
를 채취하고 담비를 사냥할 수 있었다. 왕공귀족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연
자원이 풍부한 울아 지방에 장정을 대규모로 파견하면서 이곳을 관리하는 가샨다(嘠善達, Gašanda: 촌장)만으로는 왕공귀족을 관리하기가 어려워지자 황실은
내무부 상삼기 보오이 니루 소속의 관원을 파견하여 울아 지방을 관리하게 했다. 결국 타생오랍총관아문을 설치한 배경은 황실이 귀족의 특권을 제한하고 만주의 자연자원을 독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곧 만주의 자연자원이 황권을 강화하는 데에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왕공 귀족에게 울아 지역에
서 동주 채취와 초피 사냥을 허용하던 관행은 1650년에 이르러 중단되었다.[4] 팔기분권(八旗分權)의 특혜를 누리던 왕공귀족들은 입관 후에는 국가로부터 봉
록을 받는 입장으로 권한이 축소되었고, 만주의 자연자원에 대한 수렵 채집활동은 황실에 의해 독점되기에 이르렀다.
타생오랍총관아문의 정확한 설립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국초에는 6품관 익령(翼領) 2인을 설치했다가 1657년, 달매도(達邁圖)를 6품 총관으로 삼아 수렵 채 집에 관한 일을 전담하게 했다. 1657년에 이르러 타생오랍총관은 5품관으로 승격되었다가, 1698년, 목극등이 총관으로 재임하던 시절 그의 탁월한 성적에 의해 다시 3품관으로 승격되었다.[5] 타생오랍총관은 황제에게 직접 명령을 받는 자리로, 내무부 도우사(都虞司에)서 후보를 인선하고 황제가 비준하는 세습직이었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