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궐
괵튀르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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𐰜𐰇𐰛:𐱅𐰇𐰼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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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6년경 돌궐의 최대강역. | ||||
수도 | 외튀켄(동) 수야브(서) | |||
정치 | ||||
정치체제 | 군주제 | |||
카간 551년 ~ 553년 553년 ~ 575년 | 부민 카간 이스테미 카간 | |||
• 부민 카간의 유연에 대한 반란 | 542년 | |||
• 돌궐 제국의 성립 | 552년 | |||
• 제국의 내전 | 581년 | |||
• 일시적인 재통일 | 603년 | |||
• 동돌궐과 서돌궐로의 분열 | 603년 | |||
지리 | ||||
위치 | 중앙아시아 | |||
557년 어림 면적 | 6,000,000[2][3] | |||
인문 | ||||
공용어 | 소그드어[4][5] | |||
공통어 | 고대 튀르크어 | |||
민족 | 괵튀르크족 | |||
종교 | ||||
종교 | 텡그리교 |
튀르키예의 역사 Türkiye tarih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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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突厥)이라는 한자명으로 잘 알려진 괵튀르크(고대 튀르크어: 𐰜𐰇𐰛:𐱅𐰇𐰼𐰰 쾩튀뤼크), 괵튀르크 카간국(튀르키예어: Göktürk Kağanlığı 괵튀르크 카안르으[*]), 또는 튀르크 제1제국으로도 불리는 이 국가는 괵튀르크인들이 중앙아시아에 건설한 튀르크족 최초의 카간국이다. 중앙아시아의 아무다리야강 또는 카스피해의 북서 초원 지대에서 발흥한 돌궐은 부민 카간(중국어: 伊利可汗)과 후대 카간들의 휘하에서 중앙아시아에서부터 동쪽으로 진출하여 동북아시아 초원(현재의 몽골지역)의 유연을 멸망시켜 동북아 북방 지역을 제패하였으며 이외에도 예니세이강 상류에 있던 튀르크계 민족인 철륵을 합병시키는 등 광범위한 세력 확장을 펼쳤다.[6]
어원
한자어 돌궐(突厥)은 튀르크족의 가차(假借)식 표기다. 한편 주서 이역전(異域傳)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금산(알타이산맥)의 남쪽에 살며 여여(유연)을 위하여 철공 일을 하였다. 금산의 모양이 투구와 비슷하였는데, 그들이 관습적으로 투구를 돌궐이라고 했기 때문에 마침내 이를 이름으로 삼았다."[7]
아메리칸 헤리티지 사전(American Heritage Dictionary)에 따르면 돌궐어로 튀르크(Türk)는 '강하다'라는 의미이다.[8]
기원
돌궐의 민족인 괵튀르크족과 관련하여 중국인들이 기록한 사서 가운데 『주서(周書)』, 『북사(北史)』, 『수서(隋書)』 등에는 사료가 존재한다.
돌궐(突厥)의 조상은 평량(平涼)의 잡호(雜胡)로, 성(姓)은 아사나씨(阿史那氏)였다.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가 저거씨(沮渠氏)가 세운 북량(北涼)을 멸망시키자, 휘하의 족장이었던 아사나는 5백 가(家)를 이끌고 유연(茹茹)에게 도망가서 대대로 금산(金山)에 살면서 철을 만드는 일[鐵作]을 업으로 삼았다. 그들이 살던 금산의 생김새가 투구[兜鍪]와 비슷했는데, 그들의 말로 투구[兜鍪]를 “돌궐(突厥)”이라 불렀기 때문에 그것을 이름으로 삼았다...(중략)
— 『수서(隋書)』84권 열전 49제 북적
돌궐(突厥)은 그 조상이 서해(西海)의 서쪽에 살았는데, 독자적인 부락(部落)을 이루었고 대체로 흉노(匈奴)의 다른 갈래(別種)였다. 성은 아사나씨(阿史那氏)였다. 나중에 이웃 나라에게 공격을 받아 패배했는데, 이웃나라가 그 족속을 거의 모두 죽였다. 다만 한 아이가 있어 나이가 겨우 열 살이었는데, 병사가 그가 어린 것을 보고 차마 죽이지 못하고 팔다리를 잘라 풀이 무성한 습지 속에 버렸다. 암 이리(牝狼) 한 마리가 고기를 가져다 먹였고, 그 아이가 자라서 이리와 교합해 마침내 임신을 하게 되었다. 이웃 나라의 왕이 이 아이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사람을 보내 아이를 죽였다. 그는 이리가 아이의 곁에 있는 것을 보고 아울러 이리마저 죽이려고 했다. 이때 신령스런 힘(神物)이 있어 이리를 서해의 동쪽으로 보냈고, 날아온 이리가 고창국(高昌國)의 서북쪽 산에 떨어졌다. 그 산에 동굴이 있었는데, 동굴 안에는 평탄한 땅과 무성한 풀이 있었고, 주위의 둘레가 수백 리로 사면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리가 그 속에 숨어 마침내 열 명의 사내아이를 낳았다. 열 명의 사내아이들이 장성해 밖에서 아내를 얻어 임신을 시켜 아이를 낳았고, 그후에 각기 한 개의 성(姓)을 갖게 되니 아사나도 바로 그 중 하나였는데 그가 가장 현명했기 때문에 마침내 군장(君長)이 되었다. 그 까닭에 돌궐인들은 그들의 깃발(牙帳)에 황금으로 된 이리 머리(狼頭纛)를 세워 그 근본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점차 부락이 수백 가(家)에 이르렀는데, 몇 세대가 지나 아현설(阿賢設)이라는 사람이 있어 부락을 이끌고 동굴 밖으로 나와 유연(蠕蠕)에 신속했다. 대엽호(大葉護)에 이르러 족속이 점차 강해졌다. 서위(西魏) 말엽에 이리가한(伊利可汗)이 있어 군대를 이끌고 철륵(鐵勒)을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5만 여 가(家)를 항복시켰다. 마침내 유연의 임금에게 청혼을 했는데, 유연의 임금인 아나괴(阿那瓌)는 크게 화를 내며 사신을 보내 욕했다. 이리가한은 사신을 벤 다음에 백성들을 이끌고 연연을 습격했다. 이리가한이 죽고 그의 동생 아일가한(阿逸可汗)이 즉위하여 또 유연을 격파했다. 그가 병으로 죽으려 할 때, 그의 아들 섭도(攝圖)를 제쳐두고 동생 사숙(俟叔)이 즉위하니 그를 목간가한(木杆可汗)이라고 불렀다.— 『북사(北史)』 99권 열전 87제
주서와 수서는 대개 돌궐의 설화를 이리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수·당과의 전쟁
수나라, 당나라 시기에 북방 초원의 강자로 등장한 세력은 돌궐이었다. 돌궐은 등장 이후 북주와 북제의 대립·상쟁을 이용하여 급속히 세력을 키워갔다. 중국지역의 오랜 전쟁을 끝내고 589년 수나라가 대륙을 통일했을 때, 당시 북방의 돌궐과 수나라가 대치하게 되었다. 몽골지역에서 유연을 멸망시킨 몽골 초원의 새로운 패권자 돌궐은 수나라와 대립관계가 된다. 수는 건국 후부터 돌궐에 대하여 강경책을 구사하였다. 수나라는 581년에 북방에 장성을 축조하여 돌궐의 침입에 대비하는 한편 돌궐의 사발략가한(沙鉢略可汗)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수나라의 예우에 분노한 사발략가한은 영주자사 고보녕(高寶寧)과 통모하여 582년과 583년에 거듭 수나라를 침공하였으나 격퇴되고 말았다. 그런데 당시 돌궐 내부에서는 소가한(小可汗)들의 분열과 권력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돌궐의 내분을 이용한 수의 이간책이 주효하여 결국 583년에는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었다. 동돌궐은 수나라를 공격하였다. 세력이 급격히 위축된 수나라는 동돌궐에 조공을 바치고 공주를 공녀로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돌궐에 대한 수의 이간책은 계속되어, 수는 사발략가한의 아들인 도람가한(都藍可汗)에 대항하는 계민가한(啓民可汗)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결국 도람가한 세력은 자멸하고 말았으며, 599년에는 서돌궐에 쫓긴 계민가한이 수에 내항하였다. 하지만 동돌궐은 수나라를 수차례 공격하였고 수나라는 공물과 함께 597년, 599년, 614년, 617년에 총 네 차례 4명의 수나라 공주를 보냈다.[9][10]
6세기 후반, 돌궐이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자 수나라는 서돌궐이 동돌궐을 공격하도록 부추겨 동돌궐은 약화되었다. 수나라와 돌궐의 전쟁이 멈추자 수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수나라는 고구려에게 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하였다. 당나라가 건국될 당시 돌궐은 다시 세력을 회복해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카프간 카간의 당나라 공략은 693년 영주(靈州) 정벌로 시작되었다. 그 해 영주 지방에만 8차례의 공략을 가해 거의 폐허 상태로 만들었다. 696년경에는 거란과 당나라의 불화를 이용하여 상대적으로 열세이던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 690~705)를 지원, 강력한 위세를 자랑하던 거란군을 허베이(河北) 지방에서 격퇴하였다. 그 대가로 당나라로부터 식량, 농기구, 철 등의 공급받았다. 또한 카프간은 당나라 사신으로 온 연지위 장군을 당나라의 카간으로 삼아 당나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을 시작했다. 698년 위주, 정주, 병주, 유주, 조주(趙州) 등지에 30차례 이상의 기습을 단행했고, 100,000명의 군대로 당나라군을 패퇴시켜 수많은 말과 인적, 물적 자원을 획득하였다. 톤유쿡과 빌게가 직접 지휘한 당나라 정벌로 양쯔강에서 산둥 반도에 이르는 23개 지역이 폐허가 되었다.
고구려와의 관계
돌궐과 고구려의 관계는 돌궐이 유연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 고구려는 유연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돌궐은 자연스레 고구려와 대립 관계를 가졌으며, 돌궐이 유연을 정복한 후에는 거란과 말갈의 지배권을 놓고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이후 돌궐은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고구려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며, 고구려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돌궐과 고구려는 형제 맹약의 동맹 관계를 맺게 되었다. 고구려와 돌궐의 동맹 관계는 중요한 일로서 비문에 적혀 있는데 돌궐의 오르혼 비문에서는 고구려와의 형제 동맹에 대해 고구려를 "벡클리(맥구려로 추정)"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돌궐 문자
돌궐은 중앙아시아 유목민족 역사상 최초로 문자를 독자적으로 발명하여 그들 자체의 사료라 할 수 있는 오르혼 비문을 남겨 놓았지만 해당 비문에는 그들의 기원에 관련된 기록은 적어놓지 않았다. 문자에 대해선 최근에는 흉노에도 고유 문자인 "탐가"가 발견되었으며 중앙아시아에서 탐가라고 불리는 이 문자들과 돌궐 문자의 연관성이 연구되고 있다.
같이 보기
각주
- ↑ "The tamga of the royal clan of the first Turkish empire was a neatly drawn lineal picture of an ibex", Kljastornyj, 1980, p. 93
- ↑ Turchin, Peter; Adams, Jonathan M.; Hall, Thomas D. (December 2006). “East–West Orientation of Historical Empires”. 《Journal of World-Systems Research》 12 (2): 222. ISSN 1076-156X. 2016년 9월 16일에 확인함.
- ↑ Taagepera, Rein (1979). “Size and Duration of Empires: Growth-Decline Curves, 600 B.C. to 600 A.D.”. 《Social Science History》 3 (3/4): 129. doi:10.2307/1170959. ISSN 0145-5532. JSTOR 1170959.
- ↑ Roux 2000, 79쪽.
- ↑ Smirnova 1952.
- ↑ Halil İnalcık, Osmanlı İmpartorluğu 2 Cilt Takım-Kutulu
- ↑ 居金山之陽,為茹茹鐵工。金山形似兜鍪,其俗謂兜鍪為「突厥」,遂因以為號焉。
- ↑ “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Fourth Edition - "Turk"”. bartleby.com. 2000. 2007년 1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 ↑ Benn (2002), 2–3쪽
- ↑ Cui (2005), 655–6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