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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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순(尹承順, ? ~ 1392년)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윤척(尹陟)의 3남이다.
생애
[편집]1367년(공민왕 16) 상호군(上護軍)으로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오인택(吳仁澤), 상호군 조린(趙璘) 등과 함께 신돈(辛旽)의 제거를 모의했으나, 일이 누설되어 곤장을 맞은 뒤 관노(官奴)가 되어 남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주살된 후 소환되어 다시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에 임명되었고[1], 1375년(우왕 원년) 경상도부원수(慶尙道副元帥), 1377년(우왕 3)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서 왜구를 물리쳐 전공을 세웠다.[2]
1379년(우왕 5)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있었는데, 양백연(楊伯淵)의 옥사에 연루되어 수졸(戍卒)로 배치되었다.[3]
이후 복직되어, 1389년(창왕 원년)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권근(權近)과 함께 사신으로 명에 다녀왔는데, 이때 왕씨(王氏)로 공민왕(恭愍王)의 후사를 정하라는 황제의 지시를 전함으로써 창왕(昌王)이 폐위되고, 신종(神宗)의 7대손인 정창군(定昌君)이 공양왕(恭讓王)으로 즉위하였다.[4]
이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를 역임했으며, 1392년(공양왕 3) 졸하자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5]
가족 관계
[편집]- 증조 - 윤보(尹珤, ? ~ 1329년) : 수도첨의정승(守都僉議政丞)·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 문현공(文顯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