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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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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백군(延白郡)은 1952년까지 황해도에 있던 군(郡)이다. 1914년 4월 1일 연안군(延安郡)과 배천군(白川郡)을 합하여 연백군이 되었다.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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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의 동남 경기만에 면하고, 북부는 구릉성 수양산맥이 동서로 뻗어 목단산(牧丹山)·운두봉(雲頭峯)·황의산(黃衣山, 479m) 등이 있으며, 그 지맥이 남쪽 해안 쪽으로 뻗어 중앙에 해성반도를 돌출시켜, 해안의 단조(單調)를 깨뜨려 서쪽에 용도만, 동쪽에 호남만으로 분리시켰다. 군의 남반부는 광활한 해안 평야로 동서의 군계를 이루는 례성강·화양강의 2대 강과 옥산강(玉山江)·라진포천(羅津浦川)·풍천(楓川) 등 하천의 퇴적 작용과 해저 융기로 이루어지고, 해안은 넓은 간석지가 있어 대규모 간척사업이 이루어졌다. 연안 도서로는 역구(驛鷗)·신·구 증산 등 7개 도서가 있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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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延安)은 본래 고구려 때 동음홀(冬音忽) 시염성(豉鹽城)으로 불리다가 신라 때 해고군(海皐郡)으로, 고려 초에 염주(鹽州)로 개칭되었다. 이 후 영응(永膺)·석주(碩州)로 불리다가 충렬왕 때 온주목(溫州牧)으로 승격되었으며, 충선왕 때 연안부(延安府)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조창 중 하나인 금곡포창이 설치되었고, 조선 태종 13년(1413) 도호부가 되면서 경기도에서 황해도로 이관되었다. 1895년에 다시 군이 되었고, 1914년배천군평산군의 괘궁(掛弓)·목단(牧丹) 2면을 합하여 연백군으로 개칭했다.

배천(白川)은 고구려의 도납현(刀臘縣) 치악성(雉岳城)으로 불리다가 신라 때는 구택으로 고치고 해고군(海皐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초부터는 배천으로 고치고 조선 태종 13년(1413)에 군이 되었으며, 1914년에 연안군과 합쳐졌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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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선총독부령 제111호(1913년 12월 29일)
  2. 황해도 연백군 지도 Archived 2017년 2월 16일 - 웨이백 머신, 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7년 2월 16일 확인.
  3. 황해도 벽성군 지도 Archived 2017년 2월 6일 - 웨이백 머신, 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7년 2월 16일 확인.
  4. 군정법령 제22호 시, 도직제 (제정 1945년 11월 3일)
  5. 남연백군 북한지역정보넷, 201년 2월 16일 확인.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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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연백군>
  • 우진지도문화사, 《최신 북한·중국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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