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유옹주
화유옹주
和柔翁主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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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의 옹주 | |
이름 | |
별호 | 화유귀주(和柔貴主) |
신상정보 | |
출생일 | 1740년 9월 29일(음력) |
사망일 | 1777년 5월 21일(음력) | (36세)
부친 | 영조 |
모친 | 귀인 조씨 |
배우자 |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 |
자녀 | 1남 1녀
황기옥(黃基玉) · 황씨(黃氏) |
능묘 | 황인점 · 화유옹주묘
경기도 부천시 원미로281번길 35 |
화유옹주(和柔翁主, 1740년 음력 9월 29일 ~ 1777년 음력 5월 21일)는 조선의 왕족으로, 영조의 10녀이며, 어머니는 귀인 조씨이다.
생애
[편집]출생과 혼인
[편집]1740년(영조 16년) 9월 29일, 영조와 숙원 조씨(淑媛 趙氏, 귀인 조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1746년(영조 22년), 비망기를 내려 옹주를 화유옹주(和柔翁主)로 삼는다고 전교하였다.[1]
1752년(영조 28년) 10월 5일, 호조참판(戶曹參判) 황재(黃梓)의 아들인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과의 혼인이 결정되었지만 그해 11월 화협옹주가 사망하자 영조는 화유옹주의 길례를 중지할 것을 명하였다.[2]
1753년(영조 29년) 2월 27일, 황인점과 혼인하였고, 2년 후에 출궁하였다. 이후에도 영조는 여러 차례 화유옹주의 저택에 친림하였다.
사망
[편집]화유옹주가 종기를 심하게 앓자, 옹주의 아들인 황기옥이 병수발을 들었다. 그러나 옹주는 1777년(정조 1년) 5월 21일에 졸하였다.[3]
- 고(故) 재령 군수(載寧郡守) 황기옥(黃基玉)을 효자 증직 별단(孝子贈職別單)에 올렸다.
- 황기옥은 귀주(화유옹주)의 아들로 어려서 어머니가 종기를 앓자,
- 얼굴과 말에 초조한 빛을 보였으며 입으로 빨기까지 하였다.
- 귀주가 위독해지자 울부짖으며 하늘에 빌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올려 생명을 하루 연장하였다.
- 상을 당하자 예법에 지나칠 정도로 곡을 하고 발을 굴렀는데
- 아비가 있었기 때문에 마음껏 슬퍼할 수 없었으나 생명을 보존하지 않을 듯이 하였다.
— 《일성록》
화유옹주가 졸하자 정조는 관곽, 단주(鍛紬), 미두(米豆), 전포(錢布)를 부조하고 3년간 녹봉을 그대로 지급하라고 명하였다.[3] 또한 친히 화유옹주의 제문을 지어 위로하였다.
화유옹주 제문(和柔翁主祭文)
- 아름다우신 고모님이여,
- 복록을 크게 하셨으니, 자손에게 미쳐서
- 지란(芝蘭) 같은 자손이 있네.
- 가아가 인끈을 차고서 남쪽 고을을 다스리게 되니
- 이에 위패를 받들어 때에 맞추어 풍성한 제사를 드리게 되었네.
- 백 년에 보기 드문 일
- 이보다 성대한 것이 없으니 도위가 명을 가지고 감에
- 내가 몸소 제문을 지어 고하게 하네.
- 영령이 옆에 계시는 듯하니 나의 잔을 기울이기 바라네.
황인점과 화유옹주의 묘는 경기도 부천시 여월동 산 32번지에 있으며, 화유옹주의 어머니인 귀인 조씨의 묘도 근처에 조성되어 있다.
1791년(정조 15년) 정조는 화유옹주의 아들 황기옥을 의성 현령(義城縣令)으로 봉했다.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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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편집]- ↑ 《승정원일기》 996책 (탈초본 54책) 영조 22년(1746년 청 건륭(乾隆) 11년) 1월 29일 (병신)
- ↑ 《영조실록》 78권, 영조 28년(1752년 청 건륭(乾隆) 17년) 11월 27일 (갑신)
- ↑ 가 나 《정조실록》 3권, 정조 1년(1777년 청 건륭(乾隆) 42년) 5월 21일 (을유)
화유옹주의 졸기
화유옹주(和柔翁主)가 졸하였다.옹주는 영조와 귀인 조씨(貴人 趙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에게 출가하였다.
전교하기를,
“선왕의 옹주 가운데 궁중을 출입하는 사람은 단지 이 옹주 하나뿐이었는데 뜻밖에 상사(喪事)가 났으니, 나의 슬픈 마음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고, 동원비기(東園祕器), 대단(大緞), 숙주(熟紬), 쌀, 콩, 돈, 베로써 장례에 필요한 도구를 보태게 하고 녹봉을 3년 동안 그대로 지급하라고 명하였다.